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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10. <부정공>창암공휘종덕묘갈명(滄庵公諱鍾悳墓碣銘)
1. 문헌 목록 〉22. 22世 〉12. <부정공>암농공휘종현(연승)묘갈명(巖農公諱鍾玹(淵昇)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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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정공>암농공휘종현가장(巖農公諱鍾玹家狀)
巖農公諱鍾玹家狀 府君諱鍾玹字燦汝號巖農意在所居住巖坊一農夫也我趙系出玉川今淳昌郡也始祖諱璋高麗門下侍中是生諱洪珪奉翊大夫版圖判書是生諱佺 恩贈光祿大夫玉川府院君是生諱元吉號農隱官至門下侍中與鄭圃隱夢周偰芸亭長壽力主背元戴明賛協策一等封玉川府院君享武夷院是生諱瑜號虔谷文科官至中顯大夫典農副正及鼎革後題不朝峴言志錄曰首陽山月照或心肝我 太宗朝屢徵以漢城判尹不就天性至孝當麗季短喪百日即吉之時與圃冶諸賢遵三年禮前後廬墓晚下順天之富有縣謙川上爲子孫世庄壽八十三卒訃聞 世宗遣禮官葬一品禮 命旌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幷褒其罔僕立義也是生諱斯文 贈吏議是生諱智崙齊陵參奉出爲參禮道察訪築小亭於謙川之上昆季四人長枕大衾晨夕同處以盡湛樂扁以相好是生諱穩尚瑞院直長是生諱淑璟忠順衛性度端純行己以恭是生諱大春號三灘蔭勵節校尉學問精博爲世推重而時當乙巳士禍見機筮遯築亭於漾碧江上與河西金先生玉峰白先生爲道義交多有唱和亭下石面刻三賢船遊錄又有宋淵齋趙重峰兩先生題名是生諱懋號撫松亭以才行薦除禮賓寺參奉晩德金公大器輓曰江南大老趙夫子篤厚風流世莫儔是生諱晫宣敎郎是生諱時聖號觀水亭通德郞以孝 命旌再傳而諱之賓天賦魁偉言行簡重隱居求志累入鄉薦是生諱台望雅性樂易氣貌端正是生諱成夏持身清儉事親奉祭極其誠禮寔五世以上也高祖諱元淳曾祖諱仁根祖諱得燁忠孝耕讀遺爲家訓行年八十三己丑冬因朝家望九之慶以耆老狀聞禮書階通政大夫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考諱亨奎勤儉成家敎子義方妣豊川任氏大司諫錪后相休女婦德貞順孝奉舅姑 高宗四年丁卯九月二日府君生于住巖坊九龜山下本第氣宇軒昂有鸞停鵠峙之像稍長才質穎悟就學于伯氏滄菴先生不煩敎督課誦如流微辞奧意解如迎刃先生賛曰爾乃吾師也及長追伯氏滄菴先生摳衣請業于淵齋宋先生之門多得聞爲己之學而篤於事親敬長之道前後居喪一飲一啄隨伯氏共之而每於朔望省掃雖隆寒暑雨未甞廢焉鄉里感化無不嘖嘖又切於救恤之意吉凶禮問不以遠近親踈貧瞻而闕之必躬枉問焉每年伏臘必置酒宰羊以慰農夫冒汗之苦又長於謀忠畫奇之方遊於鄉邑數十年邑而有邑綱鄉而有鄉軆正大而矻矻當時士林有疑難之事則必問焉有所未達則必決焉言無不中故域内士林莫不敬服庚戌後謂子姪曰人生此世日用大軆惟有是非兩端而己當審求其是決去其非居敬而持身則雖夷狄在座何患乎處世之容不容乎恒存乎敬愼不踐危險之境明辨乎義利不染習俗之汚甞修數間草廬延聘賢師敎子姪以義方遠近從學者甚衆每逢知舊之有文行者與先進之望重者必欵治禮待雖尋常行人有學識者見過則必多日挽接不欲相離而使子姪相從結識焉每當春之惠風和暢秋之天朗氣清則必與二三同志泛舟遊於先亭漾碧江上溯迴三賢之古蹟而一唱一飲竟日忘歸有若曠世異趣之意一日中流望見白鳥一雙飛上飛下無碍自得仍吟白鳥詞三絶曰白鳥白鳥汝身潔白潔白汝身勿染塵墨一染麈墨江漢難濯又曰白鳥白鳥汝身鶴鶴鶴鶴汝身勿近鴟鴞噫此一身誓爾同跡又曰白鳥白鳥汝身精白精白汝身能止能樂噫此白頭反不如若仍飲數盃而忘歸自後遂絶意世路從遊松沙奇先生宇萬講道論心消遣世慮不知老之將至左琴右書逍遙其間外物形骸渾然相忘奇先生贈以巖農記文互相結交焉甞切於爲先慕賢之誠爲先則竪碑修閣慕聖則大成殿明倫堂祠宇則玉川院忠武祠身任全責一一重修櫛風沐雨足跡殆遍於境内境外終始吿功士林稱頌戊辰八月二日伯氏滄菴先生練期也追想割半之痛心身不樂仍謂小子曰爾輩愼勿墜吾家聲可也竟以十月十二日卒墓大龜村西麓曾祖考墓下壬坐原訃聞知與不知皆嗟惜曰君子亡矣葬之日遠近士友誄而輓之者殆數百人而嘆曰孔明先生逝矣吾徒護身之策更無質疑之處當此叔季何以經過耶如瞽失杖哀悼不己蓮史呉先生祭輓曰哲人逝去從此以後世無指南吾黨益孤云云而至於隸吏下賤無不哀悼焉先妣海州呉氏輪江燦后學黙女性度幽閑謙恭持身寬惠待人奉舅姑盡其誠事君子盡其禮以婦德見稱而生以 高宗戊辰四月九日卒以丙戌九月二十八日墓與府君同崗異兆酉坐原生二男二女長東洙出系伯氏后次即不肖也女適竹山安鍾燮瑞山柳秉起曰箕勲過房出曰貞勲重勲不肖所出也安碩淳東淳章淳長壻出也柳承容次壻出也餘幼不盡錄嗚呼府君平日不喜著述故所存畧干篇而不幸白虎動亂盡爲遺失無以窺警咳之萬一其爲齎恨曷有其極若夫府君之出處行誼非小子淺識之所敢容易名言而自有鄉黨之輿論野史之公議矣豈可毫釐妄誣以贅其實哉玆敢述其畧而以竢有德君子公平之言先以伸罔極之私將以垂承襲之資故不揣愚亡畧叙如右 不肖子 致洙 泣血敬識 암농공휘종현가장(巖農公諱鍾玹家狀) 부군의 휘는 종현(鍾玹)이요, 자는 찬여(燦汝)며, 호는 암농(岩農)인데, 사는곳 주암방 한 농부에 뜻이 있기 때문이다. 선대 세덕은 누대장갈에 기록되었음으로 첩록 아니하고 고의 휘는 형규(亨奎)인데 근검으로 집을 일으키고 자질을 옳은 길로 가르쳤으며, 비는 풍천 임씨(豊川任氏) 대사간 전(錪)의 후 상휴의 따님으로 부덕이 정순하여 효도로 시부모를 받들었다. 고종(高宗) 정묘년(一八六七) 九월 二일세 부군이 주암방 대구리 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기량이 높고 난정곡치(鸞停鵠峙)의 기상이 있더니 조금 장성하여 재질이 뛰어나 백씨 창암 선생께 취학하였는데 정독 아니하여도 과송이 후르는 것 같고 숨은 말과 깊은 뜻을 칼날 놀리듯 해득하니 선생이 찬성하되 네가 이에 나의 스승이다 하였다. 장성함에 백씨 창암 선생을 따라 옷을 걷어붙이고 연재 송선생의 문하에 배우기를 청하여 爲己之學을 많이 얻어 들으며 어버이 섬기고 어른 공경한 도리에 독실하였다. 전후 거상에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을 백씨를 따라 함께 하고 매양 삭망 성묘를 비록 추운 엄동설한과 더운 날에도 일찍 폐하지 아니하니 고을과 마을이 감화하여 큰 소리로 칭찬 아니한 자가 없었다. 또 구휼에 뜻을 두어 친소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몸소 물었고 매년 복날과 설이면 반드시 술을 빗고 양을 잡아서 농부의 땀흘린 노고를 위로하였으며 또 사람의 일을 돕고 계획하는데 능하여 향읍에 거한 지 수십 년에 읍에는 邑綱이 있고 고을에는 鄉體가 있도록 정대하게 노력하니 당시 사림이 의심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의하고 통달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재결하면 말이 맞지 아니함이 없는고로 향당이 경복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경술년(庚戌年) 뒤에 자질에게 말하되, 「이 세상에 나서 날로 쓰는 대체가 오직 시·비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니 마땅히 그 옳은 것을 구하고 그릇된 것을 제거할 것이며, 공경하여 몸을 가진즉 비록 되놈의 땅이라도 어찌 처세를 근심하겠는가. 항상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져 위험한 곳을 밟지 말며 의리를 밝게 가려 더러운 풍속에 물들지 말라」하고 일찍 두어 간 초옥을 지어 스승을 맞이하여 자질을 가르치니 원근에서 와서 배운 자가 많이 있었다. 매양 문행이 있는 친구와 인망이 있는 선배를 만나면 반듯이 환대하고 비록 보통 행인이라도 학식이 있는 자면 반드시 여러 날 머물게 하여 자질로 하여금 서로 면식이 있게 하였다. 매양 봄 가을 좋은 때를 당하면 하나 둘 동지로 선정 양벽 강상에 배를 띄워 놀며 삼현의 옛 자취를 추모하고 시를 읊조리고 술을 마시며 해가 지도록 돌아가기를 잊으니 아득한 세상에 다른 지취가 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중류에서 백조 한쌍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을 바라보고 인하여 백조사 삼절을 읊어 가로되, 흰새야 흰새야 네 몸이 결백하니 결백한 네 몸에 띠끌이 물들지 말게 하라. 한 번 진묵이 물들면 한 수로도 씻기 어렵다. 또 말하기를, 흰새야 흰새야 네 몸이 희고 희니 희고흰 네 몸으로 솔개와 올빼미를 가까이 말아라. 아! 이 한 몸이 너와 자취를 같이 할 것을 맹서하노라. 또 말하기를, 백조야 네 몸이 정백하니 정백한 네 몸이 능히 그치고 능히 즐거워 하는구나. 아, 이 백두가 도리어 너만 같지 못하구나. 인하여 두어 잔 마시고 돌아가기를 잊었다. 이후로부터 마침내 세로에 뜻을 끊고 송사 기선생 우만(宇萬)을 종유하여 도를 강하고 마음을 의론하며 세상 걱정을 털어버리고 백발이 장차 올 것을 알지 못하고 거문고와 글 사이에서 즐기며 외물 형체를 온전히 서로 잊으니 기선생이 암농 호기를 써주고 서로 사귀었다. 일찍 선영을 위하고 어진이를 추모한 정성이 간절하여 위선하는 일로 비를 세우고 재각을 수리하여 모성은 대성전 명륜당 옥천원 충무사를 전책을 지고 일일이 중수하고 객지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발자취가 자못 경내 경외를 두루 밟아 종시 완성하니 사림이 칭송하였다. 무진년(戊辰年) 八월 二일은 백씨 창암 선생의 소상이라 반신을 짤린 아픔을 생각하고 소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의 무리는 삼가 우리집 성문을 떨어뜨리지 말라.」하시고 마침내 十월 十二일에 졸하여 묘소는 대귀촌 서록 증조고 묘하 임좌원이다. 부음이 들리매 알고 모르고 간에 군자가 갔다고 애석해하였다. 장삿날 원근 사우가 제문을 지어 애도한 자 수백 인이 탄식하되, 공명(孔明) 선생이 갔으니 우리 무리 몸 수호할 방책을 다시 물을 곳이 없어 이와 같은 말세에 어떻게 경과할까. 장님처럼 길을 잃고 서로 애도하였다. 연사(蓮史) 오선생이 애도하여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 갔으니 이로부터는 세상에 길잡이가 없어 우리 무리가 더욱 외롭다.」하였고 하천배도 슬퍼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선비 해주 오씨(海州呉氏)는 윤강찬의 후 학묵(學黙)의 영애로 그윽하고 한가하며 겸손하고 공순하게 몸을 갖추고 너그럽고 은혜로서 사람을 대접하고 시부모께 그 정성을 다하며 군자를 섬김에 그 공경을 다하니 부덕이 있다 칭도하였다. 고종 무진년(一八六八) 四월 九일에 출생하여 병술년(一九四六) 九월 二十八일에 졸하니 묘소는 부군과 동강이고 유좌원이다. 아들 동수(東洙)는 백부 후사로 출계하고 치수(致洙)요, 딸은 죽산 안종섭(安鍾燮) 서산 유병기(柳秉起)의 처며, 손자 기훈(箕勲)은 과방출이요, 정훈(貞勲), 중훈(重勲)은 불초 소생이요, 안석순(安碩淳), 동순(東淳), 장순(章淳)은 안서출이녀, 유승용(柳承容)은 유서출이고 나머지는 어려서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부군이 평일에 저술을 즐겨 아니한 고로 가진 것이 약간뿐이더니 불행히도 경인년(一九五○) 동란에 다 유실하여 경계말씀이 만에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 유한이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부군의 출처 행의를 소자의 천식으로 감히 말할 바 아니요 스스로 향당의 여론과 야사의 공의가 있을 것이니 어찌 가히 추호라도 속이고 보태겠는가. 이에 감히 그 대강을 기술하여 유덕 군자의 공평한 말을 기다리며 먼저 이로써 망극한 사정을 펴서 장차 승습의 자료를 딜움으로 망녕됨을 헤아리지 않고 위와 같이 기록함. 불초자(不肖子) 치수(致洙)는 읍혈근지(泣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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